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니스 로드맨 (문단 편집)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시절 === 1986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27순위라는 낮은 픽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뽑혔다. 이때 이미 25세였다.[* 로드맨은 배드 보이즈의 막내란 이미지지만 주장 아이제아 토마스와 동갑이고 (데뷔는 토마스가 5년이나 빠르다.) 고참급인 빌 레임비어보다 불과 두살 아래였다. 시카고 불스에서도 조던-피펜-로드맨 트리오 중 나이는 제일 위지만 연차는 제일 막내포지션 로드맨이 상대편 선수와 시비가 붙자 조던이 뒤에서 안고 "그만해 데니스! 그만해!(That's enough, Dennis. That's enough)" 하고 혼내는 영상도 있다.(That's enough는 보통 부모들이나 선생들이 아이들 따끔하게 혼낼 때 많이 쓰는 말이다.) 그러나 불스 왕조 해체 후 마음을 잡지 못했다. 1999시즌 레이커스 시절엔 팀 분위기를 개판치다가 짤렸다. 안타까운 것은 짤린 다음 시즌에 필 잭슨 감독이 레이커즈에 부임했는데, 한 시즌만 버텼으면 달랐을 수도 있다. 2000 시즌에 댈러스에서도 적응 실패.] 당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배드 보이즈로 유명했다. 늘 [[보스턴 셀틱스]]의 그늘에 가려 있긴 했지만, PG [[아이제아 토마스(1961)|아이제아 토마스]], SG [[조 듀마스]], SF [[애드리안 댄틀리]], PF 시드니 그린, C [[빌 레임비어]], 키 식스맨 SG 비니 존슨, PF 릭 마혼 등 충분히 우승 가능권이었다. 로드맨은 2년차 때 댄틀리가 부상으로 빠질 때까진 보결 신세였다. 로드맨이 스타팅으로 나온 첫 24경기에서 20승을 하면서 피스톤즈의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식스 맨#s-1|식스맨]] 정도였다. 로드맨은 수비와 [[리바운드#s-2]]에 집중했고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피스톤스 감독 척 데일리가 그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야생마에는 안장을 채우는 게 아니다 (You don't put a saddle on a mustang)'라며 로드맨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밀어 주기도 했다.[* 그 당시 로드맨이 얼마나 순진했냐면 데일리가 로드맨에 관해서 평가하기를 "로드맨은 농구를 열심히 하는거 밖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할 정도. 이 점은 필 잭슨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드맨은 두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심을 표하며 father figure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모두 로드맨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단 걸 보여주는 것. 불스 시절 로드맨은 피스톤즈 시절과 다르게 코트 밖에서 사고를 적잖히 치고 있었지만, 불스도 최대한 자유로운 그의 성격을 존중해주고 로드맨도 조던과 잭슨을 존중해 어느 정도 적정선은 지켰다. 실제로 로드맨은 조던에게 개길 생각도 못 했다는 스티브 커를 포함한 동료들의 증언도 있다. 반면 그를 컨트롤하려고 한 밥 힐은 욕만 드립다 먹고 결국 그를 버려야했다.] 로드맨 또한 데일리를 '신(GOD)'이라고 부르며 절대적인 존경을 바쳤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cadf0de8ca2842e99796cb3ed9e01826.jpg]] 페이스투페이스로 로드맨을 격려하는 릭 마혼(44번) 이 시기 로드맨은 주전 PF였던 릭 마혼에게 배드 보이즈가 만든 모든 어둠의 기술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릭 마혼은 그야말로 1970~80년대에 있던 전형적인 싸움대장형 파워 포워드로, 빌 레임비어와 함께 온갖 어둠의 기술들의 장인이었다. 스크린 장인에 여차하면 드잡이를 시전하는 Goon 역할에 충실한 선수였다. 릭 마혼은 1989년 세븐티식서스로 떠났지만 배드 보이즈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던지, 자신조차 친정팀 피스톤스를 만나면 크게 혼이 났을 정도. 1990년 시즌 막판 4월 19일 경기에서 피스톤스와 세븐티식서스가 만났을 때였다. 마혼이 토마스한테 [[https://www.youtube.com/watch?v=G6n0HZgKqK8|주먹으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어이없다는 듯 웃는 모습이 백미. [* ESPN 다큐멘터리 '30 or 30'의 배드보이즈 편에서 사건에 대해 마혼이 코멘트한바 있는데, 마혼은 피스톤즈 동료들과 끈끈한 사이였고 팀을 떠난 것도 본의가 아니었다. 1989-90 당시 새로 창단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 의해 확장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이후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된 것.(미네소타에서 뛰길 거부했다) 이 소식을 듣게 된게 하필이면 우승 퍼레이드 도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마혼은 2014년에 제작된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대한 얘기를 하던 도중 눈물을 보일 정도로 섭섭해했다. 그런데 당시 피스톤즈 동료들은 이런 마혼의 사정과 상관없이 그를 진짜 적처럼 대하며 적대적으로 나선 것. 필라델피아는 피스톤즈를 위협하는 신흥강호 중 하나였기에 플레이오프 직전에 더욱 거칠게 대한 것이다. 결국 이 갈등은 이후 레이업하던 마혼을 로드맨이 하드파울하자 그가 욕을 퍼붓고, 그 마혼의 얼굴에 [[빌 레임비어]]가 모욕적으로 공을 들이밀자 폭발하려던 와중에 생뚱맞게 레임비어를 극혐하던 [[찰스 바클리]]가 갑툭튀해 레임비어와 난투를 벌이게 된다.] 조폭두목같은 릭 마혼을 필두로 한 무슨일을 벌일지 모르는 미치광이 같은 빌 레임비어[* 다만 레임비어는 또라이 이미지와 달리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매우 침착하고 계산적인 선수였다. 그는 상대 선수들을 몰래 때리고 도발했지만 결코 퇴장이나 징계까지 가는 일은 피하도록 선을 지켰다. 실제로 그는 징계 없이 6년 넘게 연속출장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한데, 이는 NBA역대 5위에 해당된다.], 재빠르고 약삭빠르며 트래시 토크의 달인인 아이제아 토마스에게 은퇴 후에도 이를 가는 NBA 스타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게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 특히 칼을 갈던 [[칼 말론]]은 1991년 12월 4일 경기에서 골밑으로 파고들던 [[https://www.youtube.com/watch?v=P0RGcMhGMk4|토마스를 오른쪽 팔꿈치로 가격해]] 40바늘을 꼬매게 만들었다. 말론은 벌금 만 달러에 한 게임 출전 정지를 받았다. 다른 스타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드림팀에서 배제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특히 조던의 압박이 매우 컸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아이재아 토마스의 오랜 동료이자 배드보이즈의 멤버이던 존 샐리는 훗날 인터뷰에서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막은 것은 조던이 아닌 '''매직 존슨'''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조던은 당시 토마스에 대한 코멘트 자체를 거부했었고, 드림팀 합류 과정에서 이와 관련된 억측이 이어지자 아예 인터뷰에서 "이제 아이재아 토마스 관련 질문은 그만해주세요"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어쨌든 로드맨이 가세한 피스톤즈는 승승장구하며 1989년 1990년 동부 컨퍼런스 1위를 달성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아직은 원맨팀 같던 시카고를 무자비하게 조지며 2년 연속으로 NBA 우승을 달성한다. 당시 피스톤즈의 성공 스토리 중심에는 로드맨의 성장과 더불어 마크 어과이어란 남자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8-89시즌 당시 피스톤즈는 전 시즌에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명승부, 토마스의 어마어마한 활약 등으로 기대치가 커져 있었고, 2월까지 33승 12패로 괜찮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팀 케미스트리에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에이드리안 댄틀리의 존재였다. 댄틀리는 1980년대 NBA최강의 득점기계 중 하나인 스몰포워드로서, 득점왕 2회 출신이었지만,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디트로이트로 오면서 공격롤과 출전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상태였다.[* 그는 1985-86시즌 당시 유타에서 평균 29.8점을 올렸으나 바로 다음 시즌인 1986-87시즌에 피스톤즈에서 21.5점을 넣는데 그쳤다.] 노장 반열에 들었지만 여전히 위력적이던 댄틀리는 아이제아 토마스 위주로 돌아가는 공격시스템, 그리고 3년차 스몰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이 자신의 출전시간을 서서히 갉아먹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롤이 줄어든 것의 배후에 토마스가 있다고 의심했다. 이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떨어지며 1989년 1월에 팀은 8승 6패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다. 라커룸 내 갈등과 더불어 감독 척 데일리와 GM 잭 맥클로우스키와 갈등이 점점 심해지던 댄틀리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데, 경기 도중 데일리가 로드맨과의 교체를 지시했으나 '''교체를 거부하고''' 감독에게 소리를 지르며 코트 위에 계속 있었던 것. 결국 로드맨이 눈치를 보다 다시 벤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데일리와 댄틀리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며 격하게 싸운 뒤 결국 댄틀리가 마크 어과이어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게 된다.[* 댄틀리는 2014년에 방영된 ESPN의 "30 for 30" 배드 보이즈 편에서도 인터뷰로 "아이제아 토마스가 배후에 있었다"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정작 GM 맥클로우스키는 "토마스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했지만.] 1981년에 토마스보다 앞서 전체 1순위로 뽑힌 어과이어는 합류 당시 평판이 안 좋았다. 어과이어는 뛰어난 실력과 별개로 팀케미스트리를 망치는 이기적인 선수란 평을 듣고 있었으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던 아이제아 토마스 덕분에 팀에 잘 녹아들었다. 또한 댄틀리와 달리 줄어든 롤에 대한 불만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알토란 같은 득점지원을 해주었고, 팀은 30승 7패로 승률이 상승하며 플레이오프에서도 시카고 불스에게 당한 2패를 제외하면 전승을 하는 무서운 기세로 첫 우승을 차지한다. 로드맨은 이때 식스맨으로 평균 27분 출장했음에도 생애 처음으로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어과이어는 이듬해에도 큰 역할을 한다. 1989년 오프시즌에 디펜딩 피스톤즈는 큰 타격을 입는데 이때 진행된 NBA 확장팀 드래프트에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팀 골밑의 기둥인 릭 마혼을 선택한 것. 더욱 잔인한 것은 한창 우승 퍼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는 도중 이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 마혼은 퍼레이드 후 기념 행사에서 맥클로우스키에게 "저 분 덕분에 체중조절 성공했어요!"라면서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이 때 이미 그는 피스톤즈 선수가 아니었고, 행사 직후에 짐을 싸야했다. 자신이 즐겁게 농구하고, 동료들과 친하던 환경에서 팽당한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마혼은 위에 언급된 30 for 30 다큐멘터리에서 25년 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었다"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 어쨌거나 마혼이 빠진 피스톤즈는 그 빈자리를 파워포워드 존 샐리, 센터 제임스 에드워즈 등이 메웠음에도 골밑이 크게 약화되어 초반에 헤메게 된다. 피스톤즈는 좀처럼 페이스를 찾지 못하고 창단 2년차 팀이자 18승팀인 마이애미에게 패하는가 하면, 30승팀인 클리퍼스에게 패한 걸 시작으로 3연패를 당하기까지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어과이어는 실로 대인배스러운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데일리를 찾아가 '''자신의 주전 자리를 로드맨에게 넘기라고''' 제안을 한 것. 이에 대해 로드맨은 "그가 처음 날 찾아왔을때 충격을 받았죠. 식스맨 역할에 익숙해져있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다.[* 당시 영상을 보면 데일리 감독이 작전지시를 할때 로드맨이 눈치를 보며 "마크(어과이어) 투입하실 건가요?"라고 하자 데일리가 단호하게 "아니야!"라고 하고, 서서 지시를 듣던 어과이어가 로드맨의 어께를 두들기며 격려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참 선배(드래프트 연도로 치면 5년 차이다), 그것도 주장과 친하기까지 한 선배의 주전 자리를 대신 꿰차게 된 것은 심성이 여린 로드맨 입장에서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데, 당사자인 어과이어가 이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로드맨이 부담없이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토마스는 로드맨이 자신에게 "당신들이 괜찮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바로 이것이 어과이어와 댄틀리의 차이였다. 실력으로 말하자면 댄틀리가 몇수는 위일지언정 댄틀리는 자존심이 높은 선수였기에 그가 로드맨에게 자리를 내준다는것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과이어는 실력만 놓고보면 로드맨에게 한참 앞서지만 피스톤즈로 온 이후로는 그런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승부를 위해서 모든걸 내줄 수 있는 그런 마인드를 가졌던 것이다.] 로드맨은 1990년 1월 23일, 시카고 불스와의 원정경기부터 피스톤즈의 풀타임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전하게 된다.[* 이후 두번째 우승과 1991시즌까지 피스톤즈의 주전라인업은 토마스-조 듀마스-로드맨-빌 레임비어-에드워즈로 센터 두명을 올리는 트윈타워 라인업을 쓰게 된다. 시카고의 파워포워드인 [[호레이스 그랜트]]가 레임비어와 악연이 높은 것도 자주 매치업되었기 때문.] 이 시즌에 로드맨은 평균 29분을 출전하며 8.8점 9.7리바운드 야투율 58.1%를 기록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수비력으로 올해의 수비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게 된다.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가기 전 피스톤즈는 26승 14패, 승률 65%에 그쳤으나, 로드맨이 주전으로 올라온 이후 33승 9패 78.6%을 기록한다. 디트로이트 시절 당시 로드맨은 스몰 포워드로서 [[제임스 워디]], [[래리 버드]] 등 리그 내 내로라하는 슈퍼스타 스몰 포워드들을 막았다. 이후 떠오르는 불스 왕조를 상대하며 [[스카티 피펜]]을 주로 마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피펜과는 악연이 있다.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3연패를 노리는 피스톤스와 불스가 맞붙었을 때 로드맨이 피펜을 여러차례 가격한다. 슛동작 후 착지할 때 밀어 크게 다칠 뻔도 했다. 후에 로드맨이 불스에 입단하기로 결정한 뒤 들은 첫번째 말이 '저기 부엌에 가서 스코티에게 사과하게'였다.[* 사실 팬들에게는 스퍼스 시절과 불스 시절 기행이 잘 알려져있지만 선수로서 로드맨은 피스톤즈 시절이 훨씬 거칠고 더티했다. NBA는 90-91시즌부터 플래그런트 파울 처벌을 강화하는데(플래그런트 2개 적립시 즉시 퇴장), 이전까지 플래그런트 파울 처벌은 '파울당한 팀의 감독이 자유투 던질 선수를 직접 지정할 수 있다' 이것 뿐이었다. 즉 조던처럼 자유투 잘 쏘는 선수들한테는 플래그런트 파울은 일반 파울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이 상황이니 당시 피스톤즈의 기조는 "파울을 하려면 상대방을 (득점을 확실히 못하게) 무너뜨려라"였고, 이런 수비가 극에 달한 '조던룰'의 대상자 [[마이클 조던]]은 로드맨이 대놓고 공중에서 잡아채 내동댕이쳤던 적도 많다.] 1992년 로드맨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척 데일리가 해임되고 황금기의 멤버들이 트레이드되면서 피스톤스의 성적은 갈수록 떨어지고 1993년에는 플레이오프조차 진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시기 로드맨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하는데,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고 한다. 곧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트레이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